옛날 옛날 한 옛날에… 한국이 가족계획에 열심이던 시절에 자녀 수를 3명에서 2명으로 줄이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은 ‘남아선호’ 사상이었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젊은 부부들을 10여년간 설득해서 이들이 대부분 넘어간 뒤에도 끝까지 아들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시어머니였다. 초음파가 쓰이기 전에는 7공주 끝에 아들 하나를 보고 통곡한 며느리가 적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아이는 한둘을 낳되 출생 성비가 남아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건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이제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면 그런 시어머니는 없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사라진 요즘의 젊은 부부는 자기들 마음대로 아이를 낳고 있을까? 천만에. 훨씬 더 무서운 시어머니가 나타났다. 새 시어머니의 이름은 ‘직장’이다. 예전의 시어머니는 아들을 꼭 낳으라고 했지만 지금의 시어머니는 아예 애를 낳지 말라고 한다.
임신과 출산 때문에 직장의 눈흘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접어두기로 하고, 자의 반 타의 반 쫓겨나는 사례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성노동자에서 유난히 많은 비정규직이 임신이라도 했다면 당연히 나가줘야 하는 것이 ‘예의’다. 저출산이 문제라는 것이야 사장님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회사에서만큼은 낳지 말아 달라는 님비(NIMBY)적 태도를 보인다. 며칠 전 발표된 한 조사에서도 ‘출산을 장려하는 회사 분위기 조성’(36.2%)이 ‘보육료 지원’(60.2%)에 이어 직장인이 원하는 저출산 대책의 두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가 출산에 호의적인 것만으로 그 직장이 ‘가족친화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통계청의 2009년 생활시간 조사 결과를 보면, 맞벌이 주부는 직장생활을 하고도 하루 3시간20분 동안 추가로 가사와 육아 노동을 한다고 한다. 기혼 직장여성의 하루는 직장일과 집안일을 합쳐서 적어도 12시간, 출퇴근시간을 합치면 14시간은 족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는 하루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50% 정도이니 여성의 절반은 대개 이렇게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맞벌이 주부의 남편은 집안일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37분이다. 전업주부의 남편은 오히려 39분 동안 집안일을 한다. 이게 무슨 현상일까? 남성들의 집안일 기피는 물론 ‘사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 떨어진다’는 전통적 성역할의 유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요즘 젊은 남편들이 집안일을 겨우 30여분 하고 말지는 않을 것이다.
더 큰 원인은 남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부과되는 노동시간 때문이다. 기본 근로시간 자체가 길 뿐 아니라 연장근로가 임금구조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일이 많다. 그에 그치지 않는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적 연장근무와 일상적인 회식·접대는 남성들의 실제 근무시간을 통계치보다 훨씬 더 길게 만든다. 여성들의 가사·육아노동을 분담해주어야 할 그 시간에 남성들은 초과근무와 회식·접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출산 대책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물론 보육대책이다. 설왕설래가 있지만 무상보육의 시대도 멀지 않은 듯싶다. 그러나 보육은 낮 시간 동안에 부모를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밤에는 부부가 일을 나누어야 한다.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으려면, 남성도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열쇠는 직장이 쥐고 있다. 아들의 노동시간을 줄여 며느리와 균등하게 집안일을 나눌 수 있도록 시어머니가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남편의 출산휴가를 조금 연장하기 위한 법 개정안이 나오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경영계도 저출산 해소와 일과 가정의 양립의 지원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우리의 근로문화와 중소기업의 경영상 부담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조치다”라며 반대했다. 7공주라도 낳으라는 시어머니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시어머니, 누가 더 무서운가?
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