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강사보다 열정적이고 영민했던 그녀에게 나는 빨려들고 말았다. 페미니즘은 여자, 남자의 문제가 아니다, 인식론의 문제다, 라는 그녀의 말에 난 완전 빠져들었다. 그리고 공부하고 싶어졌다. 제대로 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다….”
지난달 19일 대전에서 열린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초청 강연 후기 한토막이다.(‘매력적인 그녀, 여성학자 정희진’)
14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특강에서 사회자가 이 글로 강사로 소개하자 정희진(성공회대 NGO대학원 강사)씨는 함박웃음으로 반겼다.
“보통 무슨 학교, 직장 같은 자기소개로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런 건 다르지 않나요?”
실체 없는 국가에도 ‘명예’가 있다?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7번째 강연은 이처럼 출발부터 달랐다. 정희진씨가 맡은 강의 제목은 ‘국가에 대한 명예훼손? 이 시대 ‘소수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다. 국정원에서 박원순 변호사를 국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면서 촉발된 ‘국가 명예’ 논란을 계기로, 국가가 과연 실체가 있는지, 그리고 온갖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소수자’를 만들어내는지 따져보는 강의였다.
“무난한 강의를 원하세요, 약간 검열 없는 강의를 원하세요? 당연히 후자시죠? 대신 오늘은 오픈마인드를 가져주셔야 해요.”
강의 첫머리 정희진씨가 한 당부였다. 이 글에 굳이 ‘청강기’란 부제를 단 것도, 기자에 앞서 수강생 눈으로 강연을 전하겠다는 작은 약속인 셈이다.
“새해에 모든 분들의 소망이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
“아, 그게, 바로 지옥이지요!”
연말연초 흔히 듣는 새해인사에 대한 충격적 해석에서 정씨는 ‘대의제’를 이끌어낸다. “모든 사람의 욕망이 실현되면 큰 혼란이 올 것”이라는 한 수강생 답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같이 이뤄질 수 없으며, 이뤄진다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소망을 위해 ‘사회적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 ‘협상테이블’이 바로 대의제라는 것.
‘대의제’를 풀어가야 할 국회의원이나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NGO가 등장했다. 그런데 지난해 촛불 시위에서 보듯, NGO조차 촛불 민심을 제대로 대변하진 못했다. 오히려 밤샘 시위를 말렸던 NGO 대표들이 재판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도 촛불소녀, 유모차부대 같은 ‘대중’은 실체가 없어 처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봤다.
여기서 정씨는 ‘전체’ 나아가 ‘국가’의 허상을 이끌어낸다. 한마디로 ‘국가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명예훼손’이 가능하려면 먼저 ‘국가의 명예가 있다’, 나아가 ‘국가는 인격체, 생명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전체’, ‘사회’, ‘보편’과 같은 것은 사람의 눈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권력은 국가를 실체가 있는 존재, 즉 인격체나 생명체로 ‘의인화’할 수밖에 없다. “데모하면 국가 신인도가 낮아져 수출이 안 된다”는 식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논리가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원순이 ‘국가 명예’를 높인 것으로 볼 수도
▲ 정희진씨는 이날 권력이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냈다.
ⓒ 권우성 정희진
정씨는 이런 국가 의인화 과정에서 ‘소수자’가 만들어진다고 봤다. 국가 의인화를 통해 ‘소수자’는 국가를 대표할 수 없고, 소수자의 존재 자체가 국가 명예를 훼손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정씨는 “‘소수자’ 하면 흔히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지방 사람 등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모두 특정한 조건에서 소수자다”라고 정리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이런 ‘차이’를 자꾸 만들어내는 게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다.
“국가를 개인의 몸으로 비유하면, 마치 한 사람이 의식적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성별, 계급, 나이, 장애, 인종, 성 정체성 등에 따라 인간의 몸은 모두 다른데, 누구의 몸이 표준적, 정상적인 몸이고 누구의 몸의 비정상이냐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사고에서는 억압적이고 부패한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국가-인체 파괴를 의미하게 된다.”
정씨는 독일을 전쟁의 참화에 빠뜨린 히틀러와 그에게 저항한 군인들을 그린 영화 <발키리>를 예로 들었다. 이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국가의 명예를 높인 건 누구냐는 것이다. 국가의 명예가 ‘선진화’냐, ‘인권과 민주주의’냐에 따라, 박원순이 국가의 명예를 높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명예’란 누가 주장하느냐, ‘보편’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달린 ‘경합적’인 것으로 봤다.
이처럼 국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다양한 의미부여가 가능한데도, 국가 비판을 무조건 반사회적으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정씨는 “조직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조직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하거나 완벽한 것이 아니다. 국가를 융통성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희진표 강연은 사실 이런 딱딱한 주제를 풀어내는 거침없는 입담과 귀가 솔깃한 사례들이 알짜다. ‘루저의 난’, ‘이병헌 소송’, ‘병역 가산점’ 등으로 불거진 남녀 간 젠더(성별) 논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강연이 끝난 뒤 ‘중독성 있다’, ‘재밌다’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그 모든 것을 글로 담을 수 없는 건 큰 아쉬움이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