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

미래포럼은 건강한 미래사회 실현을 위해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며 실천합니다

초고령사회디자인클럽

초고령사회 디자인 2.0 비전 워크샵

일시
2023년 06월 22일 14:00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봉로 48 라이나전성기재단

모시는글

지난 4월 18일 (사)미래포럼이 개최한 ‘초고령사회 디자인 2.0: 베이비부머의 체인지메이커 실천선언’ 세미나에 관심을 보여주시고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초고령사회는 생산인구-비생산인구, 독립-의존, 생산-돌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문법이 필요합니다. 노령세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베이비부머들이 새로운 문법의 체인지메이커로서 계속 성장하고 활력있는 삶을 지속하면서 좋은 어른나무로서 공동체DNA를 회복하는데 기여하자는 실천선언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습니다. 노년에도 개인으로서의 성장을 멈추지 않는 ‘진정한 나 되기’의 과정은 곧 ‘좋은 사회 만들기’, ‘진정한 우리 되기’와 맞닿아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그 실천방법으로 우리가 디자인한다는 뜻을 담은 ‘우디클럽 활동’을 제안하였습니다.

(사)미래포럼은 4.18 실천선언을 출발점으로 초고령사회 새로운 문법의 체인지메이커로서의 베이비부머의 비전에 공감하는 분들과 함께 우디클럽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작업을 차근차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으로 우디클럽을 조직하기에 앞서 체인지메이커로서의 베이비부머의 역할에 공감하시는 분들을 모시고 ‘초고령사회 디자인 2.0’ 비전 워크샵을 가지고자 합니다. 워크샵에서는 초고령사회 디자인 2.0 비전을 구체화하는 몇가지 실천전략 및 우디클럽 활동 모델을 제안하는 것과 함께 참석자 개개인의 관심과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 공감대를 확인하고 향후 다양한 우디클럽 활동의 기반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워크샵은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 일시: 6월 22일 목요일 오후 2시~ 오후 5시

○ 장소: 라이나전성기재단(서울특별시 종로구 삼봉로 48) (예정)

○ 내용

1) 초고령사회 디자인 2.0 비전 실천전략 및 우디클럽 활동모델 제안

2) 참여자의 관심 및 경험 나누기

프로그램

후기

여는 말씀 (이혜경 미래포럼 이사장)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지난 4월 1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여러분을 모시고 우디클럽 운동의 실천선언 행사를 가진 지 두 달 만입니다. 저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5년에 설립된 미래포럼이 2015년부터 포럼의 장기과제 중 하나로 초고령사회 디자인 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래포럼 이사장은 조형 교수님이셨는데, 우리나라 노인복지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박영란, 박영숙, 석재은, 윤현숙)로 기획위원회를 구성하셨고, 2021년까지 6년에 걸쳐 세대통합형 초고령사회 커뮤니티 만들기 프로젝트를 3가지 모델*로 진행했습니다.

(* 대학-지역사회 연계모델, 노인복지관-지역사회조직 모델, 당사자 협동조합 모델)

기본적으로 전문가 주도였던 이 활동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노인세대 스스로의 잠재력과 가능성이었습니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좋은 어른, 좋은 선배시민이 되고자 하는 욕구,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6년에 걸쳐 함께 하며 형성된 특별한 케미로 기획위원들은 1년 넘는 논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지난 4월, “우리가 디자인한다, 초고령사회, 우디클럽 운동”의 실천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논의 과정에서 특별한 두 분 위원(이경미, 양선희)을 모셨고, 장필화 여성재단 이사장님이 합류하셨습니다. 최고의 노인복지 전문가들이자 스스로 신노년세대, 베이비부머 노인세대 당사자들로 구성된 막강 기획위원회가 우디클럽의 큰 자랑입니다.

2023년(58년 개띠들이 65세 노인이 되는 해)에 시작하는, 우디클럽 운동은 베이비 부머들의 당사자 운동입니다. 우디클럽 운동은 20-30년 길어진 노년기의 삶을 살게 된, 아니 살아야 하는, 노인들의 의미있게 나이들기, 활기차게 나이들기, 행복하게 나이들기 운동이자, 노인집단의 정체성 운동이고, 노인은 비생산적이고, 의존적이며, 사회적 부담이고,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라는 고정관념, 편견, 차별(연령주의)을 거부하고 도전하는 노인들 자신의 반연령주의 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디클럽 운동은 대한민국 노인의 새로운 시민사회 운동이며 사회변혁 운동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비슷한 개념과 활동에 많이 접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민운동가 박원순의 희망제작소, 행복 설계 아카데미, 인생 이모작 지원센터, 서울시의 50+재단으로 제도화되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씨즈, 상상 우리, 아쇼카의 론지비티 사업, 다음세대재단의 노인 비영리 스타트업, 경기 베이비 부머 행복 캠퍼스, 60+기후행동 등, 비슷한 생각으로 초고령사회의 active ageing의 새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당연한 질문은 ‘그렇다면 우디클럽 운동은 무엇이 다른가?’, ‘왜 지금 해야 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그 답을 함께 찾고 만들어가려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디는 “우리가 디자인한다”의 줄임말로 노인들의 적극적 참여를 뜻하지만, 동시에, 푸른 나무, 좋은 어른들이 모여 다음 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푸른 숲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디클럽 운동의 차별성, 그것의 정체성은 아직 열어 놓고 있습니다. 클럽들의 미션, 조직, 재정, 관련 거버넌스, 시장부문과의 관계, 공공부문과의 관계 등과 관련해서 다양한 가능성과 선택지를 열어놓고 여러분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만들어가려 합니다. 오늘 워크숍이 그 중요한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기대가 큽니다.

저는 오늘 이 중요한 워크숍의 “여는 인사”의 기회를 빌려 우디클럽 운동의 전제/배경이되는 세가지 중요한 사실인식/시대 진단을 공유해 보려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은 UNCTAD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국민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특히 초고령사회 진입을 코 앞에 둔 한국인데, 노인 자살율이 15년째 OECD 국가 중 1위이고 이 나라 노인들의 42%가 빈곤합니다. 시장의 과잉과 국가의 과잉, 국가의 실패에 대해 깨어있는 시민사회/제3섹터의 건강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둘째, 우디클럽 운동은 한국사회의 또 하나의 새로운 시민사회 운동입니다. 우리나라의 시민사회 운동은 역사적 문화적 기반이 취약하고, 특히 최근에는 정통성의 위기마저 겪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진단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고, 두 번째 진단은 매우 중요한 현장의 현실로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생태계와 시민사회/제3섹터의 지형과 구조, 형성과 변화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이해가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디 클럽운동의 미래를 위해서 뿐 아니라 다양해지고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제3섹터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서,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전지구 차원의 사회운동의 경향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재)분배 프로젝트는 쇠퇴하고있고, 재분배투쟁으로부터 인정 투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경향에 대한 말씀으로 저의 긴 “여는 말씀”을 끝낼까 합니다.

역사적 시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21세기 오늘날의 위기는 칼 폴라니가 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분석한 20세기 전반의 위기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1930년대 서구사회는 한편에 자연과 노동과 화폐의 상품화의 확장을 추구하는 상업적 이해와 정치세력이, 다른 한편에, 시장의 유린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탈상품화를 요구하는 도시노동자들과 농촌 토지소유자들의 세력이, 팽팽한 대립 전선을 형성하였고, 대립이 첨예해지자 사회적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했다는 것이 폴라니의 해석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품화 세력과 탈상품화 세력의 대립을 그는 Double Movement(이중운동)이라 불렀고, 사회를 시장으로부터 보호하고자하는 탈상품화가 전후 복지국가의 명시적 미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과학혁명과 세계화와 결합된 신자유주의는 1%대 99%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상품생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상품화하려 하고있는데도, 이번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일관성있는 사회운동 전선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고, 정치적 엘리트들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1세기에는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운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중운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운동의 상승으로 삼중운동(Triple Movement)의 지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낸시 프레이저의 진단입니다.

1960년대의 정치 지형에서 반인종주의, 반제국주의, 반전운동, the New Left, 페미니즘의 제2물결, LGBT 해방운동, 다문화주의 등 경제적 재분배 보다 탈물질적인 인정과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해방투쟁들이 다양하게, 활발하게 대두된 것입니다. 포드주의 시대의 갈등은 주로 자원분배 범주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으나, 911테러가 보여준 것처럼 종교, 민족, 젠더를 둘러싼 투쟁들이 상호 중첩되면서 더 이상 인정의 문제, 문화적 지위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경제적 계급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와 인정이라는 세 번째 투쟁의 축이 강력하게 정치화된 것입니다.

하버마스의 계승자이자 인정이론의 권위인 악셀 호네트는 경제적 불평등은 단지 경제구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구조의 토대가 되는 인정 질서에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자를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왜곡된 인정 질서에 있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를 동등한 권리주체, 동등한 생산주체로 보는 새로운 인정질서가 분배구조개선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정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적 도덕범주로 간주하고, 분배라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인정 투쟁에서 파생하는 하위변종으로 재해석합니다.

그의 인정이론에서 인간의 건강한 자아형성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생활세계에서 매 순간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정체성은 인정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상호주관적으로만 형성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을 지닌 개인은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나아가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인정은 좋은 삶, 즉 행복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바람직한 국가란 국민 한명 한명의 구체적인 재능과 꿈을 실현한 사회다” 라고 말한 헤겔이 소환되고, 국가와 분리된 시민사회, 국가와 시장 둘 다 로부터 차별화된 시민사회 등 아리스토텔리스에서 그람씨에 이르는 시민사회론이 재조명되고 재등장합니다.

이러한 인정이론의 시각을 현실 복지국가 비판과 실천적 대안으로 구체화한 사람이 (테드 강연 “Services are Broken” 으로 100만 뷰를 돌파한, Radical Help의 저자) 힐러리 코탐입니다. 그녀는 베버리지가 19세기 구빈법이 20세기의 문제에 적절한 대응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구상하고 실행했던 것처럼, 그의 20세기를 위한 처방이 21세기에 맞는 처방일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녀가 제시하는 21세기 대안은 Participle, 참여와 인정입니다. 그녀는 호네트도 헤겔도 인용하지 않지만, 그녀의 비젼은 “좋은 삶”, “행복한 삶”, “flourishing life”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아”입니다. 행복한 삶의 기초는 human bond와 relationship 관계이고, 그녀는 21세기에 필요한 원조는 각자 역량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며, 역량은 건강하게 살기, 자기 자신 존중하기, 좋은 일감 구해서 일하기, 공동체 참여하기, 관계 맺기 등 존재와 행동 모두에 관계됩니다. 코탐 자신이 말합니다. We need the help to help ourselves. 19세기 COS의 귀에 익은 원칙이기도 합니다.

물론 힐러리 코탐의 Participle은 19세기 이후 최악에 이른 21세기 빈곤과 불평등의 대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2%에 이르는 한국 노인의 빈곤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인정은 재분배를 대체할 수 없어보입니다. 재분배와 인정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낸시 프레이저는 인정범주가 분배 범주를 포괄할 수는 없다면서 호네트의 인정일원론을 비판하며, 분배와 인정을 상호 환원될수 없는 독립된 범주로 보는 이원적 접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중운동의 틀에서 세 번째 축을 형성하는 인정론자들은 복지국가의 제도화된 사회적 보호에 대해서 대체로 비판적입니다. 복지국가의 사회적 급여가 기존의 위계와 배제를 전제하고 있으며, 수혜자를 dis-empower하고 시민을 client로 바꾸는 억압적 성격을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주창자는 아닙니다. 이들은 이중운동의 어느 쪽도 옹호하지 않습니다. 삼중운동의 각각의 프로젝트는 교차하면서 충돌하지만, 원칙적으로 한 축에 대항하여 다른 축이 공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이 시장화 쪽으로 기울어, 신자유주의와 위험한 연대를 형성하여, 사회적보호에 대해 2:1의 힘으로 대처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삼중운동, 분배와 인정 논쟁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우디클럽 운동은 분명히 21세기에 상승하고 있는 인정의 요구,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 운동, 삼중운동의 세 번째 범주에 속하지만, 심각해지고 있는 격차와 재분배의 요구에 대한 감수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이중운동의 두 번째 축, 분배투쟁은 역사적으로 취약하고, 사회적 자본도 취약함을 고려하여, 우리들의 우디클럽 운동이 대한민국의 21세기 삼중운동의 건강한 균형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축과 쉽게 연대하는 노인 당사자 운동이 아니라 평등과 연대, 보편적 사회권의 축과 정서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100세시대 행복한 나이들기 운동, 반 연령주의 운동, 연령통합 운동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